lappi
date : 2020
text & design : laypoetry studio


Lappi · A book of light & snow
지난 겨울에는 흰 털을 가진 개 연두와 처음으로 눈이 쌓인 길을 산책했다. 간밤에 쌓인 눈이 풍경의 모서리를 온통 둥글게 무너뜨리고 있었고 개는 깨끗한 눈 위를 조심스레 지나며 눈 속에 파묻힌 냄새를 궁금해했다. 아침 햇빛 아래에서 거의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흰, 눈의 빛 위에서 연두는 흰 털과 갈색 털이 두루 섞인 개가 아니라 연미색 털과 갈색 털이 두루 섞인 개였다. 눈의 빛깔을 흰색이라고 부른다면 연두의 털은 흰색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새하얗다는 말은 나눠 가질 수 없어서, 새하얀 눈 위에서는 새하얗다는 말보다는 덜 흰 것, 눈과 구별되는 흰색을 가진 것을 부를 다른 말을 찾아야 했다.

새하얀 아침 눈 위에서 개의 털이 가진 빛깔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눈 위에 닿은 하루 안의 다양한 빛깔을 볼 수 있다. 아침의 희고 푸른 빛, 오전의 밝은 푸른 빛, 정오 무렵의 옅은 크림색 빛, 늦은 오후의 옅은 분홍빛,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의 황금빛, 해가 저물 때의 짙은 주홍빛, 초저녁 무렵의 푸른 보랏빛, 밤의 검푸른 빛. 쌓인 눈은 그렇게 밀도 높은 흰색인데, 손바닥에 내리는 눈을 받아보면 투명하다. 투명한 입자들이 빼곡하게 쌓여서 만들어낸 흰빛에는 사실 색이 없고, 그래서 눈은 빛의 움직임을 흡수하며 시시각각 다른 색이 된다. 처음 이 엽서집의 부제로 생각했었다는 “눈은 무슨 색이든 될 수 있다”는 말처럼, 정멜멜의 사진에서는 이렇게 눈을 통해 하루가 흘러가는 동안 움직이는 빛의 색을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아주 많은 눈이 내린 곳으로 여행을 간다면, 아주 많은 눈이 내린 다음 날 아침에 창문을 연다면 가장 먼저 마주할 것이라고 상상하기 쉬운 장면은 온통 흰색으로 뒤덮인 세상일 것이다. 식물의 종류도, 자동차나 지붕의 색깔도 구분하기 어려운 다만 흰 빛으로 가득 찬 세계. 하지만 문을 열고 나가 눈 덮인 길을 걸으면 보게 될 것이다. 햇빛을 받아 미세하게 모두 다른 모양으로 반짝이는 눈 입자의 모서리를.

정멜멜이 라플란드에서 촬영한 풍경 사진에서 땅 위의 모든 사물과 풍경은 새하얗고 모서리가 없다. 둥글고 부드러운 풍경, 얼굴에 훅 들이치는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는 듯한 하얀 빛. 집도, 자동차도, 작은 풀도, 나무도, 돌멩이도, 우편함도 본래의 윤곽 대신 다만 하얗고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진다. 한편, 이렇게 풍경을 덮고 있는 눈을 가까이서 관찰한 사진에서는 쌓인 눈과 날씨가 만들어 낸 모두 다른 무늬의 눈을 볼 수 있다. 물이 지나간 해변처럼 굽이치는 줄무늬를 가진 눈, 파이 위의 머랭처럼 울퉁불퉁한 무늬를 가진 눈. 노랗게 기울기 시작하는 햇빛 속에서,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검푸른 빛을 띤 눈 속에서 달빛에 닿아 작고 작은 눈 입자의 모서리가 하늘에 박힌 별처럼 단단하게 빛나고 있는 것.

투명하고 작은 입자가 빼곡하게 모여서 아주 새하얀 물질이 되는 눈. 빛과 시간의 움직임이 가진 색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게 해주는 눈. 모든 것을 희고 부드럽게 덮어버리는, 모두 다른 눈. 인쇄 매체의 요소로 눈의 속성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 엽서집 디자인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했다. 엽서집의 표지는 사진 속에 담긴 눈의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봤을 때의 눈을 닮기를 바랐다. 앞, 뒤표지에 각각 밝을 때와 어두울 때의 눈을 가까이서 촬영한, 눈의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사진을 푸른빛이 감도는 듯 새하얗고 차가운 흰색을 가진 펄지 위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은색 잉크로 인쇄했다. 타이틀 <Lappi> 는 눈 입자에서 모서리에 빛이 맺히듯이 글자의 모서리, 세리프 부분에서 맺히고 반짝이는 빛을 강조하여 종이 위에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반짝이도록 박 후가공을 넣었다. 책 전체를 감싼 트레싱지 위에 인쇄한 스펙트럼은 정멜멜의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는 빛의 변화를 시간순으로 옮긴 것이다. 새하얀 눈 위에 빛이 닿아 ‘무슨 색이든 될 수 있는’것처럼. 내지의 사진은 실제로 하루 동안 촬영한 것이 아니지만, 엽서집을 넘기는 동안 흘러가는 하루를, 이동하는 빛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색에 따라 사진을 분류하고, 빛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배치했다. 보는 사람들에게 차갑고 깨끗한, 하얗고 하염없는 풍경 속을 종일 걷고 달리다 어둑하고 따뜻한 집에서 하루를 닫는 것 같은 기분을 주기를 바라며. 각각의 엽서 뒷면, 우표 자리에는 모두 다른 형태의 눈 결정 그래픽을 넣었다. “사진은 인간에게 마침내 인간도 이제 창조할 수 있다는 힘을 준 듯하다. 거울의 반사면에 어떠한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수반의 물에 어떠한 떨림도 남기지 않고 보자마자 사라지는, 누구도 만질 수 없는 유령 같은 빛을 사진은 형상화하지 않는가?”* 라는 나다르(Felix Nadar)의 말처럼, 정멜멜의 사진은 만질 수 없고 순간순간 나타나고 사라지는 겨울의 빛을 눈을 통해 선명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엽서집 <Lappi> 가 눈의 모든 모양을, 눈을 통해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빛의 형태를 담은 눈과 빛의 사전처럼 존재한다면 좋겠다.

* 『사진, 인덱스, 현대미술』, 로잘린드 크라우스 저, 최봉림 역, 궁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