殘存物
date : 2020
client : vostok press
covid project vostok’s eye


1

부업으로 4년 가까이 운영하던 빈티지 상점은 올해 한 번도 열지 못했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얽혀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사치스러운 시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집요하게 맴돌았다. 작업실 여기저기 자리 잡은 물건들은 말없이 밤과 낮을 지킨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게 될지, 태생과 행방을 모를 물건들이었다. 나는 라이프치히 돌바닥 위 테이블에서, 도쿄의 찻집에서, 헬싱키의 세컨드 핸즈 숍에서 서울로 가지고 왔지만 그보다 훨씬 더 긴 이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물건들일지 모른다. 그 끊임없던 움직임들이 멈췄다.


2

늦은 밤까지 밀린 일을 처리하고 나와 택시를 타려고 하는 순간 마스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턱 부근이 어쩐지 시원하다고 느낀 건 길고 길던 여름이 물러나서가 아니었나. 마스크 없이는 승차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당황한 채로 근처 약국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역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었다. 도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겨우 도움을 받아 마스크를 구매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난처했고 어쩌면 조금 두려웠다. 마스크가 없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 되었다는 것이 두려웠다.

3

집에 돌아와 표준국어 대사전 창을 켜고 생필품이라는 단어를 검색한다. 명사, 일상생활에 반드시 있어야 할 물품. 생生이라는 무겁기 짝이 없는 단어에 커서를 가져다 대본다. 깜빡인다.



4

부산 383번 코로나19 확진자가 사흘이나 머물다간 전남 순천의 장례식장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쓴 덕분에 추가 감염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장례식장은 밀폐된 실내인 데다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자칫 집단 감염으로 번질 수 있었지만, 확진자가 나오지 않아 방역 당국은 안도하고 있다.
9월의 뉴스 중.


5

<가장 강력한 공중 보건 무기>라는 단어를 TV 화면에서 보았다.
3g 정도의 무기에 모두가 삶을 의존하고 있다.


6

마스크를 이리저리 찍어본다.
흐물거리고 축축 처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력적인 피사체가 아니다.



7

촬영 현장. 2.5단계가 막 적용된 날들. 스태프들은 모두 마스크를 끼고 땀을 흘린다. 모델은 마스크를 벗고 있다. 찍겠습니다, 네? 좋아요! 네? 좋아요! 뚫고 나가지 못하는 소리들을 삼키며 진행된 촬영이 끝나고 모델들은 마스크를 끼고 인사를 한 뒤 빠져나갔다. 사진 속 맨얼굴들이 마스크도 코로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웃고 있다. 이 캠페인은 매일매일 마스크를 쓰고 출퇴근을 하는, 미팅을 하는, 운동을 하는, 길을 걷는, 장을 보는 사람들에게 뿌려질 것이다.

8

42년을 이어온 그릇 브랜드가 운영난으로 업력을 중단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의 품위 있고 매끈한 새를 좋아했다.


9

많은 것들이 불쾌하고 기이한 농담 같다. 몇 개월째 작업실을 메우고 있는 화병에 마스크를 씌운다.
지금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 그러나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 못한 것.


10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고
미국 경제매체 CNBC가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10월 2일 뉴스 중.



11

이 해는 두고 두고 기억할 해프닝인가,
어떤 비참함의 시작인가.
모두가 처음 겪고 있다는 말은 위로가 되는가,
절망이 되는가.